[녹청] Heel
그늘님 생일 축전으로 쓴 글입니다!
포크 아래서 달아난 붉은 토마토가 테이블을 뒹굴었다. 녹색 꼭지를 빼앗기고 옆구리가 조금 뭉그러진 방울토마토는 흰 테이블보에 기다란 얼룩을 냈다. 포크를 가볍게 그러쥔 손가락은 그 움직임을 쫓지 않았고 시간이 멈춘 것 마냥 미동 없이 생각에 잠겼다. 허공 어딘가에 고정된 눈동자가 시커멓게 죽어 그늘이 졌다. 평소에도 그다지 생기 없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색이 바랬다.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술렁대는 제 감정을 숨길 생각 없이 풍기는 불온한 기운은 등줄기를 빠르게 헤집었다. 조금 목이 타들어가 잔을 쥐었던 미도리마의 하얀 손은 거의 움켜쥐다시피 꽉 오므라들었다. 악력을 이기지 못한 연약한 유리잔이 동강나며 담고 있던 물과 피를 줄줄 쏟았다. 그의 무릎께와 벨벳 천으로 된 의자 또한 테이블보만큼 젖었다. 이명이 있고 난 뒤, 놀라 달려온 직원의 당혹스러운 목소리는 귓바퀴를 맴돌다 사라졌다. 그 사이 타카오에게 냅킨과 타올이 건네받았고 잔은 직원에 의해 새것으로 바뀌었다. 손바닥을 감싼 타올이 붉은 꽃잎을 피워냈다.
“나도 봤어.” 타카오가 말했다.
“아주 예쁜 여성이던걸.”
안경너머의 눈동자가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헤치고 타카오를 향했다. 타카오는 불퉁한 얼굴을 하곤 턱을 괴며 손등으로 볼 살을 밀어 올렸다.
“블론디의 거유.”
타카오의 말 위로 단정하지 못한 여성의 형상이 떠오른다. 아오미네의 단단한 팔뚝을 옭아매고 보드라운 흉부를 들이밀며 그를 소유하고 키스했던. 의도적으로 그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받는 이의 의견을 묵살하고 오로지 자신의 취향만 그득한 선물을 가져오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을 때 봤다. 아오미네는 아마 제 선물일 것이 분명한 물건들을 고르느라 자주 들른다는 것을 알고 한 짓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돌리기까지 겨우 수십 초 지났을 뿐이지만, 그 잠깐의 시간은 제가 몇 걸음이나 걸었는지 기억할 정도로 선명했다. 미도리마는 타올을 쥐고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것 마냥 불쾌한 감각이 치솟는 타카오가 지금부터 저를 염려할 뿐인 이야기를 쏟아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 포기하지 그래.”
타카오는 아오미네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어지간히 미련한 미도리마는 그래도 그를 만날 것이다.
—Midorima X Aomine : Heel
묵직한 눈꺼풀을 깜빡대며 간지럽게 닿아오는 붉은 입술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겹지도 않다는 것처럼 지속해서 살갗을 쓸어내는 손바닥이 작고 부드럽다. 아오미네의 전날 주야는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씩씩한 그녀에게 이끌려 대낮에 영화관 데이트와 쇼핑을 마치고 저녁에는 진탕 술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녀와 잤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풀네임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다이키, 다이키, 아오미네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간질였다. 통통 대는 목소리에 맞춰 웅웅 진동하며 쪼아대는 두통에 인상을 썼다. 어제 약도 했던가.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전날을 떠올리려고 쓸데없이 힘을 빼던 아오미네는 이불을 쭉 끌어당겨 목 아래로 둘둘 감았다. 그제야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곧 침대 아래 놓여있던 상자를 들어올렸다. 부스럭 대며 상자 속에 얌전히 자고 있던 새 구두를 개시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으로 구두를 발에 끼워 넣더니 다리를 쭉 들어올렸다. 앞코가 뾰족하고 굽이 높은 붉은색 하이힐이다. 길게 뻗은 그녀의 다리 끝에 달린 발을 딱 맞게 감싸왔다. 심플하지만 화려한 색은 무척 고혹적이어서 구두의 윤기부터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뜯어보지 않고 한 눈에 살폈을 땐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게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값을 지녔다. 저 구두의 진가는 카드를 긁은 후에 나오는 것이 틀림없다.
아오미네는 망설임 없이 구두를 벗어 다시 상자 속으로 집어넣는 그녀를 계속 곁눈질했다. 부스럭대며 상자가 굳게 닫친다.
“마음에 안 들어?”
“항상 네가 고른 건 내 취향은 아니라서.”
그녀는 상자를 손가락 끝으로 찬찬히 쓸었다.
“사실 네 진짜 애인의 취향인 거 아니야?”
아오미네는 대꾸하지 않고 인상을 쓰며 몸을 굴렸다. 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벽 구석에 낀 얼룩을 꼼꼼히 훑었다. 미도리마가 곰 모양이라고 말한 뒤로 정말로 곰처럼 보이는 얼룩이다. 그녀가 속옷을 입고 셔츠를 걸치는 동안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 소리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걸음걸이가 단정한 이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어머.” 그녀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떨어졌다.
그녀는 옷을 마저 다 걸치고 아오미네의 뺨에 키스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무척 눈치가 빨랐다. 현관문이 다시금 열렸다 닫히며 칙칙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오미네는 상체를 일으켜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침부터 뭐야.”
몇 주 만에 만난 애인에게 건네는 인사가 매정하기 짝이 없었다. 미도리마는 개의치 않고 부스럭대며 종이가방 안에서 상자를 꺼내들었다. 아오미네는 미도리마의 손에 감긴 붕대에 제일 먼저 시선이 갔지만,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 미도리마가 꺼낸 상자는 그녀가 들고나간 상자와 똑같이 생겼다. 조심스럽게 열어본 상자 안에는 붉은색 구두가 들어있다.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던 다른 누군가의 취향이 확실한 그 붉은색 구두가. 제 발사이즈에 맞춰 제작 의뢰를 했을 정성을 생각하면 징그러울 정도다. 아오미네는 몸에 이불을 둘둘 감은 그대로 발만 쏙 내밀어 침대 밑으로 내렸다.
“내꺼냐?”
미도리마는 고개만 끄덕여 수긍했다. 아오미네의 침대 곁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미도리마는 그의 발에 조심조심 구두를 신겼다. 조금도 거칠지 않고 침착했으며 또 만족감이 담긴 손길이다. 구두는 재볼 것도 없이 발에 딱 맞았다. 아오미네는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로 올려 꼬고 발을 슥 들어올렸다. 뾰족한 앞코가 미도리마의 턱을 밀어 올린다. 미도리마의 눈빛이 금방 날카롭게 날이 선다.
“변태.”
아오미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목을 한 손으로 휘어잡고 끌어당겨 복사뼈에 입을 맞춘다. 이를 세워 잇자국을 내고 혀로 쭉 핥아 올리자, 움찔 반응했다. 침대 시트에 양 팔을 뻗어 몸을 지탱한 아오미네의 어깨 아래로 이불이 내려와 맨 살갗을 비췄다. 종아리를 손으로 받치고 무릎에 키스하며 다리 사이를 꿰찬 미도리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오미네는 생각했다. 제 취향의 구두를 샀을 때 지금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거라고.
미도리마에게 아오미네 다이키란 취향의 구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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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만에 단편을 썼는데 너무 힘이 들어가버렸어요(왈칵)
그늘님 정말정말 생일 축하드려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