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한 청우 전력 60분.
[화청] 간이역
얼어붙은 땅이 녹아 어느새 땅위로 푸른 풀들이 솟기 시작했다. 간간히 보이는 코스모스는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꽃잎을 펼치고 처음 보는 세상에 인사하듯 흔들렸다. 사람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간이역은 군데군데 부서지고, 낡았지만 그 모습이 나쁘지만은 않다. 마치 오랜 세월 그곳을 지키고 있으면서 자연과 동화된 듯 잘 어울렸다. 그곳에 발길을 들인 아오미네와 카가미는 두어 개 정도 페인트칠이 벗겨진 체 놓여있는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듯한 날씨에 땅을 비치는 햇빛 또한 따듯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차갑고 낯설었다.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을 밟아 굴리며 발장난을 치던 카가미도,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고 바람에 흔들려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의 감각을 쫓던 아오미네도 입을 다문 체, 간이역마냥 그곳에 동화되듯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좋아해.’
좋아해, 아오미네. 하고 답지 않게 초조한 얼굴을 한 카가미의 손이 아오미네의 옷자락을 쥐고 떨었다. 놓으면 떠나버릴 사람처럼 절박한 손길에 아오미네는 그의 손을 한 번, 고개 숙인 카가미의 머리칼을 한 번 시선을 던졌었다.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하교 후에 농구도 하고, 햄버거도 사먹었었지만, 카가미의 분위기가 어딘가 조금 달랐었다. 자신을 빤히 주시하면서 웃다가도 시선이 마주치면 허둥지둥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고, 살결이 스쳤을 때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헤어질 쯤에 굳은 결심을 한 사람처럼 진지하고 단호한 얼굴로 아오미네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카가미군이 아오미네군을 좋아하게 된 건 좀 오래전 일입니다.’
고백 이후, 만난 쿠로코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사내가 같은 사내를 좋아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하필이면 그게 왜 자신인지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카가미는 좋은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다, 라고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는데.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거예요. 정말 평생을 원수지간으로 살 것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좋아지게 마련이니까.’
키세는 카가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그의 편을 들어, 아오미네가 마음을 조금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 앞에 까놓고 말해 카가미가 싫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카가미와 더 가까워지는 것도 분명히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그런 식’으로 본다는 것은 조금 어렵다고 생각했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그와 그런 것을 한다고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어쩌면 이런 자신 때문에 카가미는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채찍질도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만을 강요하기 보단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남자였으니까.
어울리지 않게 튀어나와 있으면서도 주변에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마치 이 간이역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대답해달라는 것은 아니야. 긍정적인 대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야. 나는 그저, 내가 너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해서 그랬어. 언제까지고 속일 수 없었으니까.’
아오미네와 만나는 날이 이어질수록 카가미는 죄책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오미네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닌 척 아오미네를 속이고 만나서, 그가 다른 사람과 교재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멀어지려고 시도도 해봤지만, 눈치 빠른 아오미네가 쉽게 알아챌까봐 두려웠다.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뭔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쿠로코에게라도 캐물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전에 고백했다. 그가 자신을 멀리해도 좋으니까, 더 이상 속이지 않을 수 있도록. 거절해도 좋으니까, 이 마음을 접을 수 있도록.
‘생각해볼게.’
아오미네는 별다른 반응 없이 툭 내뱉으며 돌아섰다. 떨리는 손이 그에게서 떨어지고 카가미는 그의 옷깃에 닿아있던 자신의 손을 반대쪽 손에 쥐었다. 경멸하고 혐오스럽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아오미네는 이런 사람이었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내뱉는 말에 사람을 쉽게 상처 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진지한 사람에게만큼은 스스로도 진지한 사람.
그는 이 간이역에 부는 봄바람 같았다.
‘내일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그리고 아오미네는 카가미와 이 조용하고 한적한 간이역에 왔다. 사람이라곤 아오미네와 카가미 밖에 없어서 마치 이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은 이곳으로. 두 사람은 아까부터 쭉 똑같은 자세로 조금씩 틀려지는 서로의 작은 몸짓에 귀를 세우고 온 신경을 오로지 상대방을 위해 곤두 세웠다.
“····ㅡ.”
그때 조금 강한 바람이 간이역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약한 풀과 꽃잎이 떨어져 나와 바람을 타고 함께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그에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 카가미와 아오미네의 사이로 안착한 작은 꽃잎에는 카가미의 손이 닿았다. 그리고 그의 위로 아오미네의 손이 닿았다. 카가미는 꽃잎에서, 아오미네의 손등으로 그리고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가 말없이 손을 돌려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옭아맸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은 질색이니까.
“차근차근 가보자.”
우선은 이렇게 손잡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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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