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포테아님
[화청] 의식
오늘은 처음으로 알람소리 없이 잠에서 깼다. 왠지 잠이 오지 않아서 밤늦은 시간에 눈을 붙였건만 아직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눈꺼풀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구름 낀 듯 몽롱한 의식이 맑게 개이면서부터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에 심장이 미약하게 뛰었다. 약속 시간까지 한참이나 남은 시간이라 조금 더 잠을 자려던 그는 말똥말똥 해진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선잠을 잤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는 동안 꾸깃해지고 돌돌 말려 있어야할 이불이 깨끗하게 펴져있다. 잠까지 설칠 정도로 자신이 그렇게나 오늘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을 거르고, 양치질을 시작했다. 베개에 눌린 머리를 손으로 빗다가 그는 인상을 쓰며 양칫물을 뱉었다. 결국 입고 있던 나시티와 반바지, 속옷까지 벗어던지고 샤워를 시작했다. 미적지근하게 쏟아지는 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았다. 평소에는 샴푸로만 대충 감고 나오던 그가 웬일로 린스까지 사용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나오던 그는 옷장을 열어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너무 티내고 싶지 않아 옷은 적당한 것을 골라 입기로 했다. 어차피 있는 거라고는 편하게 입을 만한 옷들뿐이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옷차림이 되었지만, 그는 스스로가 굉장히 신경 써서 입었다고 생각했다. 까만 티셔츠에 청바지, 그것만으로 너무 밋밋해서 긴팔 남방을 허리에 둘러매 묶었다.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거울을 보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모자를 눌러 쓰기로 했다. 모자를 쓰면서도 몇 번이나 모자를 돌렸더니, 머리가 까치집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똑바로 썼다. 기대감으로 풀어진 입가가 민망해서 모자를 꾹 누르다가 휴대전화 진동에 거울에서 시선을 때고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늦지 말고 와.]
아오미네는 피식ㅡ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를 톡톡 두드렸다.
[너나.]
*
일반적인 연인들의 데이트라는 것은 해본 적 없다. 닭살스럽게 애칭을 불러본다던가,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디저트카페를 간다던가. 기념일을 챙겨본다던가. 제 생일 챙기는 것도 귀찮아서 누군가 챙겨주지 않으면 설렁설렁 넘어가곤 했던 그는 스물이 넘도록 농구에만 빠져 살았다가 이제야 임자를 만났다. 언젠가 연인이 생긴다면 쭉쭉 잘 빠지고, 가슴도 빵빵한 초미인을 사귀지 않을까,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아오미네에게 나타난 애인은 자신만큼 시커멓고 덩치 커다란 사내였다. 어떤 이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신밖에 모르는 유아독존, 천하의 아오미네가 남자와 사귄다니. 그것은 마치, 그가 정확히 맞춰 바른 자세로 던진 공이 골대에 맞고 튕겨져 나오는 것과 비슷한 확률이 아닐까. 처음 아오미네가 애인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이마요시였는데, 금세 소문이 퍼져 거의 연락 두절 상태였던 와카마츠에게까지 연락이 왔었다. 어떤 거유의 미녀에 천사길래 성질머리 더러운 꿰찼냐고 비아냥거렸다가, 남자라는 말을 듣고 헉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카가미 타이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와카마츠는 세상에, 따위를 중얼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아오미네가 카가미와 사귄지 이제 약 한 달이 지났다. 솔직히 아직도 아오미네는 자신이 카가미와 사귄다는 것 자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귀기로 한 것은 굉장히 가벼운 마음에서 나왔다. 카가미도 아오미네도 거의 장난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그 전부터 모모이가 둘이 사귀는 사이 같다며 한결같이 말하곤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카가미와 아오미네는 정말 자주 붙어 다녔다. 상당히 틀어지는 부분이 많아서 툭탁대며 싸우기도 하고 정말 크게 대판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금세 풀어져서 놀러 다녔다. 그런 그들은 ‘사귄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전처럼 같이 밥도 먹고 놀러 다니고 농구도 할 텐데. 하지만 막상 연인선언을 하고 나니 무언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왔냐.”
“어.”
아오미네는 자신이 신경 쓴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옷을 조금 흐트러트렸다. 카가미는 어느 때보다 단정한 모습으로 아오미네를 맞이했다. 그러면서 아오미네와 마찬가지로 신경 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뭐 할래? 영화 볼까?”
“···시커먼 사내놈들끼리 간지럽게 영화는. 배고프니까 일단 밥이나 먹자.”
카가미의 제안에 아오미네가 툴툴대며 먼저 앞장 서 걸었다. 카가미가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묘하게 닿을 듯 말듯 거리를 두고 걷던 두 사람은 곧 인파에 밀려 딱 부딪혔다. 잠깐 맞닿은 어깨가 화끈거려 아오미네와 카가미는 얼른 다시 떨어져 걸었다. 보고 있지 않아도 옆에서 느껴지는 존재감. 온몸이 예민하게 곤두서서 상대를 살핀다. 그리고 상대의 몸짓 하나하나에 심장이 파르르 떨어대는데 영 어색하다. 그러다보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에 띄는 라면가게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주문을 하고 다른 곳을 쳐다봤다. 뭔가, 뭔가 이 어색함을 날려버릴 주제가 없을까.
“아오미네.”
“카가미.”
동시에 외치고 말았다. 민망함에 입을 다물었더니 더 어색해졌다.
“너 먼저 말해라.”
“아, 음···아니 물 더 필요한 가, 해서.”
카가미는 아오미네의 빈 컵을 가리켰다. 목이 바짝바짝 타서 벌컥벌컥 마셔댔더니, 금세 바닥이다. 아오미네가 빤히 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더니, 얼른 몸을 일으킨 카가미가 새로 물을 떠왔다. 컵을 그의 앞에 내려놓고 조그맣게 미소 짓는 카가미 때문에 아오미네는 후끈 열이 올랐다. 날도 더운데 여긴 에어컨도 안틀어주고 뭐하는 거야. 아오미네는 티의 목 부분을 붙들어 흔들며 훅, 숨을 내뱉었다. 곧 라면 두 그릇이 나왔다. 후루룩 후루룩, 매콤한 라면을 말없이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면서 아오미네는 카가미를 흘깃 거렸다. 라면 한 그릇을 빠르게 해치운 카가미는 또 한 그릇을 시켰다. 저대로 한 세 그릇은 더 먹을 것 같은데. 아오미네는 일부러 천천히 면발을 씹어 넘겼다.
“라면 먹고 나면 어디갈래?”
“·······.”
“·······.”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카가미랑은 만나면 농구하고 오락실가고, 집에 와서 플스를 끄집어내어 게임하고, 잡지를 읽거나, TV를 봤다. 그런 것 이외에는 뭘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는다. 연인들끼리는 주로 뭘 하지? 아오미네는 급히 모모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답장은 정말 빠르게 도착했다.
[다이쨩, 지금 카가밍이랑 데이트 중?]
[ㅇㅇ]
[영화를 보러 가는 건 어때? 영화관에서의 은근한 스킨쉽! 두근두근 할 거야o(^-^)o]
[뭐?]
[나도 테츠군이랑 같이 영화 보러 가고 싶다ㅠ.ㅠ]
한숨을 삼키며,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그 사이 카가미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더니,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영화 보러 갈래?”
이번에 아오미네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가미는 기쁜 듯 고개를 끄덕끄덕끄덕 움직이더니, 라면 네 그릇으로 만족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라면가게를 나와 근처 영화관에 들어서자, 휴일의 여파로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요즘 흥행하는 영화로 표를 두 장 끊고 멀뚱히 서있던 아오미네와 카가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곳곳에 보이는 연인들의 애정행각을 눈으로 쫓으며 질색인 얼굴을 했다. 팝콘을 입에 넣어주고, 볼에 뽀뽀하고, 껴안고. 공공장소에서 저게 뭐하는 짓들이야.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친 아오미네와 카가미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뺨이 화끈거린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부리다가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상영관으로 들어섰다. 아오미네는 아까 라면 네 그릇을 먹은 사람 같지 않게 팝콘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는 카가미를 빤히 바라봤다. 빵빵하게 부푼 뺨을 쿡쿡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아오미네는 자리를 찾아 앉고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오미네는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선잠을 자고 난 뒤라, 피곤한데 배까지 부르니 상당히 졸렸다. 벌써부터 눈이 가물가물해지는데 어느 정도 좀 졸았던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영화 중반이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으니까, 더 잘까 하고 눈을 감는데 카가미의 큼지막한 손이 아오미네의 머리통에 닿았다. 툭. 아오미네의 머리가 카가미의 어깨에 떨어졌다. 아오미네는 번쩍 정신이 들었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카가미에게 들릴까봐 조마조마하는데, 카가미의 손이 아오미네의 손을 슬며시 붙잡아왔다. 팔걸이에 걸쳐진 두 팔이 얽혀들면서 손가락까지 이어졌다. 뜨거운 손바닥의 온기가 맞닿아 섞인다. 아오미네는 이미 잠이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계속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던 건, 조금 더 카가미에게 기대고 싶었던 마음이 있어서였다. 왠지 민망해져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어두워서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관을 나온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맞닿았던 손의 온기가 달아나기 전에 아오미네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더워서 손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왔지만, 견딜 만 했다. 영화관을 나오고 나니, 또 할 게 없어서 한참을 그 주변을 서성였다. 또 모모이에게 문자를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했을 쯤, 야외 농구장이 시야에 들어찼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때 쯤, 모모이에게 문자가 왔다. 그랬더니, 연달아 문자들이 날아왔다. 아오미네는 인상을 쓰며 빠르게 눈으로 읽어 내렸다.
[연애 초보 다이쨩이 카가밍과 지금쯤 농구하고 있을 확률 UP!]
[카가밋치와 데이트라고 들었슴다! 농구 말고 좀 연인다운 걸 해보십셔!]
[오늘 사자자리와 처녀자리 운세가 매우 좋다는 거다. 처녀자리 럭키아이템, 모자.]
[너 카가미랑 데이트한다며? 또 농구하냐? ㅉㅉ]
특별히 마지막으로 도착한 와카마츠의 문자에는 [ㅗ]하고 답장을 보내줬다. 남이사. 내가 카가미랑 농구를 하던, 말던 내 맘이지. 아오미네는 툴툴 대며 휴대전화를 신경질적으로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벌써 먼저 달려가서 자신을 향해 농구공을 흔들어 보이는 카가미를 바라봤다. 데이트인데, 역시 농구는 좀 그런가. 아오미네가 선뜻 다가오지 않자, 카가미가 고개를 기울이다 큰 소리로 외쳤다.
“아오미네, 농구 하자!”
그래, 일단은 농구 하고 생각하지 뭐. 카가미랑 농구할 때가 가장 즐거우니까. 지금도 아오미네는 영화관에서 만큼이나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
되도록 빨리드리려고 짬내서 썼어용ㅠㅅㅠ
포테아님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