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션 받은 키워드
-웨인
-서리낀 유리창 너머 보이지 않는 너의 얼굴
-립스틱이 묻은 물컵
-네코미미
[화청] 거래
귓가를 웅웅 울리던 소리가 선명해졌다. 정신을 나른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카페 안쪽의 조용한 재즈음악, 그 속에서 묘하게 통통 튀는 피아노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흘려 들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멜로디의 제목은 잘 모르겠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 조금 허기가 진 것 같아서 주문한 시나몬브레드에는 입도 제대로 대지 않았다. 대신 캐러멜 시럽이 정갈히 뿌려진 생크림을 조막만한 포크로 조금 떠 입에 넣었다. 달달한 생크림이 혓바닥 위에서 녹아들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다. 단맛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았다. 실상 이딴 간식거리로는 허기진 배를 달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단맛에 물려 배가 덜 불러도 관두고 말지. 덕분에 그는 반쯤 비운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들었다.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렸지만,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잔을 내려놓고 나니 또 다시 눈앞이 몽롱해졌다. 며칠 밤을 새가며 마친 큰 프로젝트의 여파로 쉬지 않으면 다 뒤집어 엎어버릴 것 같은 정도로 몰렸다. 주변의 완곡한 권유로 연차를 내서 잠이나 퍼질러 자려고 했던 계획을 물리고 결국 밖으로 나왔다가 낭패를 봤다. 미칠 듯이 피곤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럴 바엔 그냥 집에서 쉬지. 타이가, 네 얼굴 정말로 창백한 거 아니?”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찰랑대는 금발을 목 뒤로 넘기고 미적지근한 물 잔을 들어올렸다. 입술에 닿은 컵에는 붉은색 립스틱자국이 선명하다. 물을 삼키느라 울렁대는 목울대가 매끄럽고 희게 반짝거렸다. 옆 테이블에 앉은 두 남자의 시선이 잠깐 여자에게로 닿았다. 여자의 얼굴, 가슴, 허벅지. 한겨울임에도 두툼하지 않고 타이트하게 딱 달라붙는 옷을 입은 여자는 일부러 눈웃음을 치며 남자들에게 꼬리를 살랑 흔들어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신경 꺼. 그보다 웨인, 그 머리띠는 뭐야?”
“선물 받은 거. 귀엽지 않아?”
까만색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띠. 놀이공원에서나 하고 다닐 만큼 화려하거나 커다란 것은 아니라, 언뜻 그냥 취향이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 하고 다닐 법한 머리띠다. 게다가 여자 정도면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눈 꼬리가 얇게 치켜 올라간 모양새나 하는 행동이 딱 고양이 같으니까. 정확히 표현하자면, 비싼 값에 사들인 혈통 좋은 고양이 같달까. 온갖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가씨 같은 고양이. 그게 맞는 것 같다.
“나 ‘그 사람’이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볼게. 너도 여기서 괜히 시간낭비 말고 집에 가서 눈 좀 붙여.”
여자는 희고 가는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카페를 벗어났다. 옆 테이블에서 끈덕지게 시선을 주던 남자가 곧장 따라 나갔다. 조금 기가차서 웃었더니, 일행이었던 남자가 찌푸린 인상으로 바라봤다. 그는 귀찮은 실랑이는 피하고 싶어 곧 옆 테이블에게서 신경을 껐다. 여자의 말대로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할까 싶기도 하면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 갈팡질팡했다. 솔직히 뭘 하려고 해도 뭘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집과 일, 그리고 또 일. 그 외에는 어떠한 취미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신은 정말 따분하기 짝이 없다. 이제부터라도 무언가 흥미가 있을만한 것을 찾아야 하지 않나. 운동이라도 다닐까. 그는 등받이에 등을 바짝 기대고 허리를 쭉 폈다가, 다시 구부렸다. 턱을 괴고 고개를 돌려 보이는 창은 하얗게 성에가 끼었다. 손바닥으로 대충 쓸어 보이는 밖에는 눈발이 휘날린다. 추위가 날아드는 거리에서 자신의 옷깃을 여미며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로 사내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곧 다시 뿌옇게 변하는 유리창 너머의 사내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던 얼굴은 ‘그 사람’임이 틀림없다. 카가미는 멍했던 정신이 확 들면서 망설임 없이 코트를 챙겨 카페를 빠져나왔다.
*
아오미네에게 오늘은 무척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일주일 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의 샌님을 하나 골라, 그의 주머니를 털었다. 제 주머니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 것도, 그에 지갑이 빠져나가는 것도 알 지 못한 체 멍청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샐러리맨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고맙다, 멍청이.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건지도 모르겠다. 샐러리맨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한 번 돌아봤기 때문이다. 들켜버리는 줄 알고, 얼른 고개를 숙여 모자를 꾹 눌러쓰고, 인파속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훔친 지갑들을 주륵 늘어놓고 하나하나 털어보면서 실망감에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오늘 할당량은 채우지 못할 것 같았다. 귀찮아도 더 돌아볼걸.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체, 마지막으로 횡단보도에서 만난 샐러리맨의 지갑을 여는 순간 우그러진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큭큭, 목구멍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갑 안쪽에 그득그득 들어찬 현금은 그날 할당량의 두 배 정도나 되었다. 그 길로 술이나 퍼마시러 갔다가, 지갑도 빵빵하고, 가슴도 빵빵한 여자하나를 얻었다. 오늘은 그 여자의 초대를 받았다.
평소같이 후드에 시커먼 모자나 눌러썼던 머리를 조금 만져도 보고, 파카하나를 걸쳤다. 옷 같은 거 제대로 입을 줄도 몰라서, 제 얼굴 하나만 믿기로 했다. 이 정도면 그 어떤 여자도 넘어오지 못하진 않을 거라 호언장담하면서 말이다. 나가기 전에 날씨가 어떤지 보려고 조막만한 원룸 방 창문을 열었다가, 한기가 한가득 몰려들어 냉큼 닫았다. 조금씩 눈도 내리고, 벌써부터 콧물이 줄줄 흐르는 것 같아 잿빛 목도리 하나를 목에 둘렀다. 다시 한 번 거울을 살피며 머리카락을 건드리다가, 집을 벗어나 긴 다리를 쭉쭉 뻗어 빠르게 걸었다. 아오미네는 추위가 딱 질색이었다. 딴 사람보다 추위를 타는 탓에 옷을 여러 겹 껴입는 것도 귀찮고, 덜컥 걸리는 감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도 싫었다. 그는 제 머리로 쌓이는 눈을 신경질 적으로 털면서 카페 하나를 지나쳤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커다란 카페. 고급스런 간판에 적힌 묘한 글자를 봐선 어디 체인점 같지 않다. 추울 땐 따듯한 커피가 좋지. 그가 나중을 기약하고, 카페 옆 레스토랑을 막 지나칠 때였다.
“ㅡ뭐야!”
손목이 붙잡혀 그대로 레스토랑 옆의 골목으로 끌려들어갔다. 퍽, 하고 부딪힌 등은 두툼한 옷 덕분에 크게 아프지 않다. 대신 기분은 더러웠다. 그가 어느 고약한 살인마 저리가라 할 정도로 인상을 쓰고 상대방과 시선을 마주했다가 놀랐다.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 저번과 비슷하게 창백한 얼굴인, 그 호구 샐러리맨이다.
“내가 진짜 눈썰미 하나는 좋거든.”
“그게 멀쩡히 잘 지나가는 사람 다짜고짜 붙잡아가지고 할 소리냐?”
아오미네는 시치미를 땠다. 그 잠깐 마주친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할리 없다. 그냥 비슷한 사람을 본 거라고 착각하게 만들면, 그대로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의 얼굴은 정말로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너 그 때 그 소매치기잖아. 일주일 전에 횡단보도에서 내 지갑 꺼내간 놈.”
“뭔 개소리야. 증거 있냐? 있으면 까보던가.”
그가 자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아오미네 또한 증거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확신에 찼다. 지갑을 훔치는 현장에서 바로 붙잡히지 않는 이상은 아니라고 끝까지 잡아 때면 되었다.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들켜서 붙잡힌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여유로운 얼굴을 가장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증거도 없으면서 함부로 사람 의심해도 되는 거냐며 따져볼까, 고민하던 아오미네는 입 꼬리를 찬찬히 끌어올리며 웃는 모양새에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가 너한테 사람을 붙였거든.”
“뭐야?”
“오늘 그녀를 만나러 가나?”
아오미네는 왈칵 인상을 쓰며 “씨발.”하고 욕을 씹어뱉었다.
“뭘 그렇게 열을 내? 너나 웨인이나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만났으니, 피차일반인데.”
“··········.”
“어쨌든 네가 말하는 증거.”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눈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입은 옷도 장소도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남의 주머니를 터는 모습뿐이라는 거였다. 아오미네가 미간을 구겨 인상을 쓰고 그의 멱살을 붙잡아 쥐었다. 경찰에 찌를 생각이었으면, 사진을 증거물로 재출해 고소해버리면 된다. 굳이 제 눈앞에 나타나 이러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
“무슨 속셈이야. 네 지갑에 금칠이라도 해놨어?”
“딱히 내 지갑을 돌려받으려는 건 아냐.”
그가 어깨를 으쓱 하면서 아오미네의 손을 때어냈다.
“너 완전 내 취향이거든.”
“·······뭐?”
때어낸 아오미네의 손을 붙잡은 그대로 쭉 잡아 당겼다. 아오미네가 주르륵 그에게로 끌려가면서 하얗게 뿜어 나오는 입김이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묘한 정적. 얼른 튀어야 한다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깜빵 들어갈래, 아니면 나랑 잘래?”
그가 무언가 재미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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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님의 제 상상속 이미지는 이런 이미지가 아닙니다ㅋㅋ
그냥 닉넴만 빌려서 모브를 출현시켰어요ㅎㅁ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