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청 연성키워드
[나를 잊어줄래/시간여행/두통]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나뭇가지 밑으로 붉고 노란 낙엽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낙엽 사이사이로 내비치는 열매에선 불쾌한 냄새도 났다. 열매를 피해 조심조심 길가에 쌓인 낙엽만 밟으며 걸었다. 땅거미 진 길가의 돌담 옆을 걸으면서 너와 나는 말이 없었다. 그날따라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없다. 너무나 조용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소리,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 네 숨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너와 나만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모른 체 걸었다. 한 걸음 또는 두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전처럼 어깨가 닿을 듯 말듯 나란히 서서 걷지 않았다. 그때 나는 조금 눈치를 챘던 것도 같다.
너와 이 길을 몇 번을 걸었는지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손가락에 꼽을 수 없을 만큼 함께 걸었다는 것은 안다. 너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할 줄만 알고 생각 없이 흘려보냈던 것도 같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의 마음이 식고 너의 마음이 떠나버렸을 때야 알아챘다. 조금 더 소중히 했다면 좋았을 것을. 기어코 걸음을 멈춰선 너를 따라 멈춰 섰다. 너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며 말했다.
“헤어지자.”
그건 어디까지나 네 일방적인 통보였다.
너를 붙잡아볼걸. 매달려도 볼걸. 후회했을 때 너는 이미 내 곁에 없었다.
그렇게 너는 영영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ㅡ Kagami X Aomine :오뇌
이른 아침 알람소리 없이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을 뜨자마자 두통이 일었다. 눈도 뻐근해서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만 붙이고 앉아 한참을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은 긴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정신이 몽롱하다. 나를 침대 밖으로 쫓아내는 네 발길질이 없이 아침을 맞는 건 언제나 그랬다. 그렇게 일 년간 지속적으로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 없다면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것이 좋겠으니, 취미를 가져보라는 둥, 운동을 좀 해보라는 둥, 약을 처방했다. 따분한 농구도 그만두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머리가 지끈 거릴 때마다 약을 주워 먹었던 것 같은데, 약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잠만 와서 어떨 때는 하루를 꼬박 잠만 잘 때도 있었다. 곧 주변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이쨩,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나는 거짓말이 일상이 되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서 베란다로 나갔다. 찬바람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아서 두툼한 외투하나를 걸쳐 입었다. 슬리퍼를 직직 끌고 나가 난간에 서자, 발과 손으로 싸늘한 바람이 와 닿는다. 목까지 스미는 찬기에 놀라 얼른 겉옷을 여몄다가, 그간 꺼내보지 못한 외투 안쪽의 지포라이터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문양하나 없는 심플한 디자인의 라이터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다시 외투 안쪽으로 밀어 넣고 내가 쓰는 터보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너무 추워서 담배를 반쯤 태우다 말고 들어왔다. 문득 너와 하나를 가지고 다투다 나눠폈던 그 맛이 그리워졌다.
식탁위에 있던 퍼석퍼석한 빵을 씹어 먹었다. 종이 상자라도 씹는 것 같아서 잼을 찾았더니, 냉장고 깊숙이 처박힌 잼 병을 들었다. 곰팡이가 피어있다. 입맛이 달아나서 잼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쇼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너였더라면 당장 사가지고 올 테니 아침은 거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댔을 거다. 멍하니 TV의 까만 화면을 바라보다가 쇼파 구석에 놓여있던 농구공을 만지작거렸다. 꺼끌꺼끌한 표면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쓸어보면서 한참을 그러고 있었더니 무언가 북받쳐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카가미.
전화벨이 울렸다. 오늘 같이 바다나 보러가자던 사츠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츠키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감기에 걸려서 오늘 같이 못갈 것 같다고 말했다. 나름 날 신경 써서 여행계획을 세웠을 사츠키의 기가 팍 죽어있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며 전화를 끊고 샤워를 했다. 혼자라도 바다는 보러갈 수 있으니까. 옷을 단단하게 챙겨 입고, 지갑만 챙겨서 나가려다, 문득 첫 번째 서랍장에서 새하얀 봉투를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사실 혼자가 아니라, 너와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낯선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조금 졸음이 몰려오면서 또 다시 두통이 일었다.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텅 빈 옆자리의 싸늘한 공기에 몸을 움츠리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가사는 영어라서 도통 알아들을 수 없지만, 듣기는 좋다. 네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들어보라고 멋대로 틀었던 거다. 그때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듣다가 깜빡 졸아서 역을 지나쳐버렸었다. 나는 그때처럼 눈을 감고 잠깐 너의 꿈을 꾸었다. 살을 부대끼고 너와 기대어 앉아 네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자니, 너의 붉은 머리가 내 머리 위로 톡 떨어진다. 꿈속에 너는 그대로였다.
아오미네, 나 말이야···ㅡ래. 그래서ㅡ.
그때 넌 뭐라고 했어?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부드럽게 멈춰선 기차 밖으로 나와 바다를 향해 걸었다. 모래사장을 밟고 찬바람이 부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운동화 안쪽으로 모래가 신경 쓰여서 발가락을 꼼지락대다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던 흰 봉투를 꺼내들었다. 이걸 너에게 건네받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세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잊으려 노력했음에도 너와 헤어진 그날을 선명히 기억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날로부터 나만 시간이 멈춰버린 것도 같다.
모퉁이가 꾸겨진 봉투를 안에는 겨우 손바닥만 한 종이가 들어있었다.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쳐보고는 웃었다. 겨우 이 한 문장을 쓰려고 편지지를 사서 봉투에 잘 접어 넣었을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다. 바보 아니야, 이거. 그날 꿈속을 헤매며 비몽사몽 들려왔던 너의 목소리가 조금 선명해졌다.
‘아오미네 나 말이야···죽을 거래.’
떠올랐다. 네가 그날 뭐라고 말했는지를.
‘그래서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해질까봐 무서워.’
종이 위로 떨어진 눈물에 잉크가 조금씩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마치 지금까지 쭉 멈춰있던 내 안의 시계바늘이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슴 한 구석에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감정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떨어져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가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종이를 다시 반으로 접어 손에 쥐었다.
정말로···바보새끼. 망할, 바카가미.
[나를 잊어줄래?]